diary

[ 일기 ] 가치가 없는 사람

눈솔설이 2023. 3. 23. 15:08

고등학교 졸업 전 중소기업에 들어갔다.

"졸업 후 뭐해먹고 살아야하지?"라는 고민을 매일 했던 시기라 빠른 취업은 나에게 '안심'을 주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동안 난 안심한 상태로 학교를 다녔다.

 

첫 직장에 첫 출근을 하였다.

그 전에 쓴 일기의 내용처럼 난 개발자로 취업해 놓고 개발에 자신이 없었다.

 

아. 오랜만에 일기를 쓴 이유는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직을 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이유는 내가 '희귀 자가면역 질환'을 앓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공격하는 멍청한 병이다.

 

생각해 보면 나를 닮은 병이라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가 없다.

나도 회사를 다닐 때 스스로를 깎아 내리며, 스스로에게 상처를 수 도 없이 많이 냈다.

 

완치가 불가능한 나를 닮은 이 병으로 나는,

파이터도 아니면서 귀는 변형되어 만두귀가 되었다.

성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여 상기도를 폐쇄해 버렸다.

상기도 폐쇄로 인해 숨을 쉴 수 없게 되어 기관절개술로 기도에 구멍을 냈다.

 

그렇게 나는 진통제 없으면 버틸 수 없고, 숨은 목관으로 쉬며,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나를 아프게하면서 악착같이 배운 개발은 수술을하며 피폐해진 나와 함께 사라졌다.

20살에 어떻게든 더 나은 삶을 살자며 악착같이 달렸던 장정은 이제 없다.

 

그렇게 21살이 되었다.

 

나의 모든 것이 떠나갔다.

친구도, 직장도, 꿈 꾸던 과거의 나 자신도.

 

하지만, 가족은 내 곁에 남아줬다.

나의 그녀도 내 곁에 남아줬다.

 

가족이 떠나지 않은 이유는 대충 알 것 같다. 가족이니까,

그녀가 떠나지 않은 이유는 모르겠다.

 

빛나야할 20대를, 그렇게 빛나고 싶어했으면서 병든 사람 곁에 남는 이유를 난 알 수가 없다.

고마웠다. 너무 고마웠다.

그치만, 날이 갈 수록 미안하고 힘들었다.

 

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 조차 너무 힘들다.

숨을 쉴 때 마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잠이들면 너무 편해서 꿈을 꾸는 날엔 깨어나기 싫다.

꿈속에서의 난 아프지도 않고 말도 할 수 있었다.

열심히 말을 하다가 꿈에서 깨면 꿈에서 깼으면서도 쉬지않고 입을 금붕어 마냥 뻐끔뻐끔 거리고 있는 현실을 나를 반긴다.

 

정말 죽고 싶다.

생을 끝내고 싶다.

 

팔에는 주사로 인한 흉터가 빼곡하다.

누워만 있었더니 몸은 부풀었다.

 

더 이상 고통은 무섭지 않다.

지금보다 아프다고 내 인생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생을 정말 마치고 싶지만, 내 곁에 남아준 그녀를 위해서 병들어 죽기 전 까진 살아보려고 한다.

가족에겐 미안하지만, 가족은 내가 떠나도 혼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떠나면 혼자 남는다.

 

내가 죽음을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거라 생각한다.

아예 무섭지 않은건 아니지만, 쉽게 생각한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겠다.

난 쉽게 생각한다.

 

5개월 넘게 빨대보다 작은 구멍으로 숨을 쉬며 직장을 다녔고, 샤워하다 쓰러져서 응급실에 갔었으며, 몸 전체에 있는 연골에서 염증이 매일 활발하게 발생하여 진통제 없이는 버티기 힘들정도다.

숨은 기도 절개 후 삽입한 관으로 쉬어 말도 못한다.

 

말을 못한다는게 별거 아닌 것 같겠지만, 지금의 난 통증보다 말을 못하는게 더 고통스럽다.

내 목소리도 기억 안 난다.

그렇기에 난 죽음을 조금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더 이상 잃을게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직 많이 남았다. 시력도 청력도 아직 뺏기지 않은게 많다.

앞으로 호전되지 않으면 다 뺏기겠지만, 지금은 아직 뺏기지 않았으니 실컷 보고 들을 생각이다.

 

자본주의세상에서 성인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건 지옥과 같다.

아프지만 나도 21살이기에 하고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다.

하지만, 용돈을 받지 않는다. 19살 때 부터 받지 않았는데 지금와서 받기도 그렇고 병원비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집은 형편이 좋지 않다. 

3년 남은 집대출을 보며 어떻게든 버티고 달리는 부모님에게 완치가 불가능한 병을 앓는 아들이라는 새로운 짐을 드렸기 때문에, 더 많은 걸 바랄 수 가 없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세상에 알리고 싶어 알바를 열심히 구해봤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의 가치는 없었다.

 

음식점 알바는 모두 거절 당했으며, 경비 업무도 거절 당했다.

"이건 말 안 하고도 할 수 있지!"라고 생각했던 업무들에서 마저 다 거절을 당하고 나니 너무 우울해졌다.

어느날 지원한 소프트웨어 테스트 알바에서 연락이 왔다.

인사담당자가 간단 업무라 간단한 면접 후 채용을 하겠다며 전화를 걸었는데, 난 받지 못했다.

이후 문자로 전화를 받지 못한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말을 못한다고 전했다.

정중히 말을 전한 내게 돌아온 답변은 "그럼 말할 수 있을 때 전화주세요^^"였다.

 

우울해졌다.

과거의 난 우울증이 정말 한심한 병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자신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속으로 "마음의 병? 그거 그냥 의지박약하다는 말을 돌려말하는거 아닌가?"라고 생각 했었다.

 

앓아보니 알겠더라.

정말 힘든 병이다.

환자에게 저런 나쁜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지 비로소 아프고 나니 알게되었다.

 

우울한 얘기는 이쯤하는 걸로 해야겠다.

돌고 돌아 내가 오늘 일기를 다시 쓴 이유는 재택이 가능하고 전화가 필요없이 채팅으로만 업무를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난 가치가 없는 인간이다.

그치만,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면 가치 있는 인간으로 살고싶다.

 

5년 전부터 정말 가지고 싶던게 있었다.

첫 월급을 타면 꼭 사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막상 돈 나갈 곳이 많아 사지 못했다.

 

하지만, 가치 없는 인간으로 살게된 지금 나갈 지출도 없다.

이 상태라면 돈을 내 능력으로 모아서 살 수 있을 것이다.

5년 동안 가지고 싶어했던 로봇청소기를 꼭 살 것이다.

 

기존에도 할 줄 알았던 웹 퍼블리싱을 다시 연습해서 포트폴리오를 제작하여 퍼블리싱 알바를 지원하고,

지원 이후 결과를 기다리며 영상편집과 게임개발을 공부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올려 돈을 모을 것이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이다.

이미 병들고 아픈나지만, 나이는 젊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삶이지만, 아직 죽은 건 아니기에 달려본다.

아 참고로 난 뛰지 못한다. 농담이지만 진짜다. 난 뛰지 못한다.